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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예술촌, 텅빈도시를 예술로 채우다

[ 웹진 3호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1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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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과거의 영광은 어디가고..


  마산은 일제강점기 항구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경남선과 마산선(오늘날의 경전선)의 종착역으로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농산물들이 마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산은 일본과의 교역지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산은 정부의 경공업 육성 정책의 적지로 낙점되었습니다. 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되고, 한일합섬과 한국철강이 들어서며 전국의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며 마산 경제를 이끌었습니다. 이에 마산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여 한때 전국 7대 도시로 불리며 ‘경남 제1의 도시’로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공업이 쇠퇴하고 중화학공업 위주의 육성 정책으로 이웃 도시 창원이 급성장한데다, 경남도청과 법원, 검찰청 등 각종 행정기관들마저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마산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럼에도 마산은 1990년대까지 한동안 상업 도시로서의 활력을 유지하였고, 1994년에 인구 50만을 넘기며 합포구, 회원구로 분구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지역의 경기 침체로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일반구가 폐지되는 일도 겪습니다. 일반구가 폐지된 유일한 도시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은 마산은 끝없이 추락했고, 결국 2010년 창원시에 통합되어 ‘마산시’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경남의 명동’ 이었던 마산 창동


“창동은 내 청춘이 모두 담긴 곳이에요.”
“양복점, 양장점이 줄 지었고, 다방 천지, 극장 천국이었죠.”
“그냥 밀려다니고 부딪히면서. 친구 손을 놓았다 그러면 그 친구 그 날 못 보는 거예요.”

  마산 창동은 마산의 전성기를 함께하며 명실상부 중심가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곳입니다. 1955년 개업하여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60년 전통의 학문당 서점은 그 옛날 마산의 젊은이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선호하던 곳이라 ‘약속 1번지’로 불렸으며, 학문당에서 만나 시민극장으로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마산의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였다고 합니다. 시민극장은 1994년 폐관할 때까지 수많은 영화를 상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약속 장소가 되었던 곳으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마산 3대 부자’로 언급되었던 바로 그곳입니다. 1959년에 개업한 이후 지금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려당’은 ‘꿀빵’으로 유명한 곳이고, 창동에서 고려당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빵집인 ‘코아양과’ 역시  『응답하라 1994』에서 마산 3대 부자와 함께 언급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몰락으로 인해 창동 상권도 함께 쇠퇴하게 됩니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 창원과 마산에 잇달아 백화점과 대형마트,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창동 상권은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창동은 마산 지역의 어르신들에게 향수로만 남으며 한때 잘나갔던 ‘원도심’으로 불리게 됩니다. 한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칠 만큼 북적였던 창동은 수출자유지역의 규모가 줄어들고 한일합섬과 한국철강이 이전해온 대신 인접한 창원이 공단으로 성장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창원 신시가지의 불빛이 환해질수록, 창동 거리의 표정은 나날이 어두워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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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80년대 창동거리, 우: 오늘날의 창동거리>
출처: 좌-김경년의 창동수다, 우-본인촬영

창동 골목에 예술을 채우다


  몰락한 창동 골목에 희망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 통합 창원시의 출범 이후였습니다. 창원시로 통합되며 창원시에서는 구 마산지역에 ‘마산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2011년 시에서 빈 점포 50개를 임차해 지역 예술인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 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산이 지닌 예술적 강점을 토대로 도시를 살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창동의 골목길을 아름답게 단장했습니다. 마산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문신 선생을 재조명하는 ‘문신예술 골목’이 만들어졌고, 과거 마산 예술의 르네상스 시절을 추억하는 ‘마산예술흔적 골목’을 조성하였으며,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과 기존 상인들의 공간을 융합한 ‘에꼴드창동 골목’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2013년 5월 창동은 예술촌이란 간판을 달게 됩니다. 창동예술촌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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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문신예술 골목, 중간: 마산예술흔적 골목 야경, 우:에꼴드창동 골목>
출처 : 좌, 우-본인촬영, 중간-창동예술촌 홈페이지

 메마른 도심에서 소소한 재미를


  예술촌 골목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세 개의 메인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총 50개의 입주시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체험공방도 있으며, 이곳에서 방문객들에게 현장체험교육의 기회를 제공합니다(도예공방, 냅킨공예, 손글씨, 화실 등). 제작된 예술 작품들은 전문갤러리(창동갤러리, 리아갤러리 등) 및 아트센터에서 전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고라 광장에서는 수시로 각종 퍼포먼스, 콘서트, 버스킹 등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경남 MBC 창동스튜디오’ 에서는 ‘정오의 희망곡’ 공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합니다
(평일에 한정). 방청 신청도 가능하며, 사연신청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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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리아갤러리, 중간:창동갤러리, 우:버스킹 공연이 진행중인 아고라 광장>
출처: 본인촬영(전체)

마산 르네상스를 꿈꾸며


  마산 창동예술촌의 사례는 도시재생에 있어 민간과 공공기관의 협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창원시는 2011년부터 ‘창원도시재생지원센터’를 설립하여 창동예술촌 이외에도 마산 원도심 여러 곳의 재생 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창동예술촌 사업은 부림창작공예촌 사업과 함께 아트플랫폼 사업 가운데 하나로 진행된 것입니다. 창동예술촌은 아직 그 역사가 짧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낡고 공동화되어 미관이 좋지 못했고 재생의 희망도 없을 것만 같았던 골목길을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아름답고 활기찬 곳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창동예술촌은 현재 창동이 창원, 마산 지역의 중심상권이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현재 중심상권이 된 합성동이나 상남동 지역에 비해 수십 년 뒤처져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았고 받아들여, 다른 지역을 따라잡고자 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인정하고 옛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역발상으로 지역을 재정비하여 뜻 깊은 성과를 거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창동예술촌의 사례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어느 부분이 아픈지 정확히 진단하여 환자의 증상에 딱 맞는 약을 처방해 준 것과 닮아 보입니다. 이제 도시 재생도 획일적으로 ‘재개발’만 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당 지역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해당 지역에 맞춤한 현실적인 도시재생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미래를 밝히는 도시재생의 지름길일 것입니다.

<참고자료>
1. 마산시사 편찬위원회,『마산시사』, 마산문화원, 2011
2. 창원도시재생지원센터 홈페이지, http://www.cwurc.or.kr/
3. 창동예술촌 홈페이지, http://www.changdongart.com/
4. 김경년의 창동수다, http://changdongsud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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